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리더쉽의 변화(출처: 길벗카페에서 펌)

790354 2006. 6. 21. 22:04
한국의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외국에 사는 내게도 느
껴지는 제일 큰 변화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과 조롱이다. 지난
5월 31일 지방선거가 끝나고 역시 대통령과 모든 집권세력에 대한 엄청난 비난과 조롱
이 이어졌는데 인터넷 신문기사의 댓글만을 본다면 한국은 거의 무정부수준에 다
다르지 않았나 싶다. 그들에 의하면 박정희와 달리 노무현은 도저히 대통령이라고
할 수 없으며 하루빨리 물러나는 것이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길인 것처럼 들린다.
야당이 모든 주정부를 맡고 있는 호주상황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정말 그
말이 맞는 말일까?

하지만 내가 아는 한 노무현은 박정희보다 훨씬 도덕적이고, 국가와 국민을 위해
일하며, 정직하고 착한 사람이다. 노무현은 자기 동료들을 강제로 제거하지 않았
고, 정치적 반대파들을 고문하거나 감옥으로 보내서 죽이지 않았으며, 군대와 경
찰과 정보부를 사유화해서 강압적인 통치를 하지도 않았고, 남북대치구도를 정치
적으로 이용하지 않았으며, 연예인들을 강제로 데려다 음주와 오입을 즐기지도 않
았다. 내가 이해하는 문제의 본질은 대통령의 리더쉽 스타일과 그 리더쉽을 받아
들이는 국민들의 자세의 변화이다.

박정희와 군부독재 시대까지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리더쉽은 아랫사람은 윗사람을
섬기고 따르며,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다스리고 지시하는 방식이었다. 아랫사람은
윗사람에게 불만이 있어도 드러낼 수 없었고, 윗사람은 늘 아랫사람을 권위적으로
대했다. 하지만 이미 한국사회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리더쉽은 전혀 다르
다. 아랫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윗사람을 비판하고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면 사정없
이 따진다. 윗사람들의 모든 생활은 노출되어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쉽게 알려
지고 늘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살아가도록 감시의 대상이 된다. 반면 윗사람은
언제나 아랫사람을 돌보고 도와주어야 하며, 작은 일에도 드러내놓고 구별하면 차
별을 했다고 큰 문제가 된다. 야단치고 가르치기 보다는 솔선 수범해서 본을 보이
고 앞장서서 나가야 한다. 따라서 예전에는 주위의 사람들이 굽신거리면 아주 힘
있고 지위가 높은 지도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주위 사람
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것을 말해준다.

문제는 이러한 리더쉽의 변화가 교회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데 있으며, 길
벗 예배모임이 주목해서 추구하려는 것이 바로 교회 내에서 리더쉽의 변화이다.
즉 변화된 사회의 리더쉽을 교회에서 실천하자는 것이며,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
교회가 선도하자는 것이다. 말로만 세상을 이끄는 빛과 소금이 아니라, 세상보다
도 앞서서 먼저 변화된 리더쉽을 개발하고 실천하자는 뜻이다. 물론 이것은 기본
적으로 “섬기는 리더쉽” (Servant Leadership) 을 말한다. 아울러 길벗예배모임
에서 추구하는 리더쉽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
어지는 리더쉽이다. 담임목사 한 사람이 모든 결정을 하고 최고의 권위를 갖는 것
이 아니라, 여러 교인들을 격려해서 참여시키고 의견을 수렴해서 모두가 가진 지
도자의 역량을 발휘하게끔 한다.

이러한 리더쉽의 변화는 그 동안 권위적인 리더쉽 아래에서 억눌려왔던 많은 질문
을 자유스럽게 던지도록 한다. 특히 여기에는 기존 전통교리에 관한 어떠한 질문
도 포함된다. 당회장은 담임목사만 해야 하나? 교회는 꼭 성장해야만 하는가? 얼
마나 언제까지 성장해야 하는가? 설교, 축도, 심방은 목사만 해야 하나? 예수는
하나님의 아들인가?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? 예
수의 동정녀 탄생은 생물학적으로도 진리인가? 예수의 부활은 꼭 육체부활이어야
만 했나? 복음서의 여러 기적 이야기들은 오늘 우리들이 이해하는 과학으로도 사
실인가? 예수 자신은 삼위일체를 믿었나?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으면 구원받
지 못하는가? 죽어서 나만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인가? 십일조는 무조건 해야 하나
? 교회를 다니지 않고 착하고 바르게 사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인가? 기독교만
이 단 하나뿐인 참종교인가?

이렇게 거북하고 어려운 질문들을 다루는 길벗 예배모임은 따라서 편안한 익숙함
보다는 불편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임이다. 질문과 대답을 쉽게 예측할 수 없기
때문이다. 잘 훈련된 종교인보다는 서툰 신앙인이 되기 때문이다. 그 결과 지금까
지 가져왔던 믿음과 확신이 흔들릴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, 반대로 새로
운 믿음과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. 전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교회생활에서 누렸
던 평안함과 만족감이 사라질 수도 있고, 반대로 전통과 권위에 대한 거부감과 반
발이 있었다면 길벗 예배모임에서는 그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자유함과 해방감을
느낄 수도 있다. 편안한 익숙함에서 나와 불편한 새로움을 거쳐 가면서 자신과 이
웃과 세상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모든 것을 보듬어 안아주는 하나님을 다시금 깨
닫고 경험하는 것은 모든 길벗들의 바램이다.

불편한 새로움과 씨름하는 길벗 예배모임은 결국 기독교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
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모임이다. 우리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새
롭게 발견하기 위해 우리들은 모든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. 하
나님은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불교인, 모슬렘, 힌두교인, 유교인, 천도교인, 바
하이, 무속인 그리고 무종교인들을 통해서도 우리들에게 말씀하심을 믿는다. 왜냐
하면 그들 모두는 우리들과 함께 신앙여정의 길을 가는 신앙의 동반자들이기 때문
이다. 우리는 그들과 만나 대화하고 함께 식사하며 때로는 예배를 통해 그들의 이
야기를 듣기를 기뻐한다.

기독교 내에서 삼위일체론와 일신론이 어느 것이 맞고 틀림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
것이 각자가 이해하는 하나님을 더 잘 설명해주느냐는 문제인 것처럼, 육신의 세
상을 살아가면서 영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각각의 종교 역시 어느 종교가 옳고 그
른 것을 따지는 것은 구시대적이고 파괴적이며 결코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.
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길벗들에게는 주위의 사람들이 자
신의 신앙의 길에 적합한 종교를 찾아 바른 선택을 하도록 돕는 것이 전도이며 선
교이다. 시드니 길벗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 지금까지 역사 속의 종
교인들의 구습을 벗어버리고, 개방적이고 창조적이며 진보적으로 여러 이웃들을
포용하면서 더불어 신앙의 길을 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후사들이다.